로버트 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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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로센은 미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로, 1908년 뉴욕에서 태어나 1966년 사망했다. 그는 뉴욕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미국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각본가로 활동하다가, 1947년 영화 《바디 앤 소울》로 감독 데뷔했다. 《올 더 킹스 맨》(1949)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수상했지만, 공산당 이력으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HUAC 증언 거부와 전향을 거쳐, 《허슬러》(1961)로 다시 성공을 거두었다. 로센은 노동자의 삶, 갱스터, 파시즘에 대한 반대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필름 느와르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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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로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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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명 | Robert Rosen |
출생일 | 1908년 3월 16일 |
출생지 | 미국 뉴욕 |
사망일 | 1966년 2월 18일 |
사망지 | 미국 뉴욕 |
국적 | 미국 |
민족 | 유대인 |
배우자 | Sue Siegel (1936년 결혼) |
자녀 | 3명 |
친척 | Daniel Rossen (손자) |
경력 |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제작자 |
활동 기간 | 1932년 – 1963년 |
데뷔 | 1937년 (각본가) |
이전 직장 | 워너 브라더스 (1936년 입사), 컬럼비아 영화 (1946년 이적) |
수상 | |
골든 글로브 상 | 골든 글로브상 감독상 (1950년, 모두가 왕의 부하들)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1961년, 허슬러) |
주요 작품 |
2. 생애
1908년 3월 16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권투 선수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학비를 벌어 뉴욕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이상주의적인 작품 스타일로 브로드웨이의 무대 연출가나 각본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5년 탈당 전까지 미국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 워너 브라더스에 의해 할리우드로 초청받아 각본가로서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 1937년, 로이드 베이컨 감독의 『표시된 여자』로 각본가로 데뷔했다.
로센은 컬럼비아 영화사로 이적하여, 1947년에 자신의 경험을 살려 복싱을 소재로 한 『바디 앤 소울』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1949년에는 『올 더 킹스 맨』이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 성공하여 제21회 아카데미상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시상식 직전 그가 공산당원이었던 과거가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 소환으로 밝혀지면서 아카데미 감독상이나 아카데미 각본상을 놓쳤다.
1951년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HUAC)에서 증언을 거부하여 한때 영화계를 추방당했다. 고뇌 끝에 전향하여 1953년 위원회에서 다수의 당원 이름을 증언한 이후 뉴욕, 유럽, 중남미를 영화 제작의 거점으로 삼아 두 번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1961년 『허슬러』를 통해 다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후보로 지명되며 한때의 기세를 다시 보여주었다.
1966년 2월 18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향년 57세. 영화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6841 Hollywood Blvd.)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평생 감독한 작품은 10편이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로버트 로슨'''은 1908년 3월 16일 뉴욕시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였고, 아버지 필립 로슨은 주택 도장공이었다.[1] 젊은 시절 그는 뉴욕 대학교에 다녔고, 포커를 치고 몇 번의 프로 권투 시합을 했다.[2] 이 두 가지 경험은 각각 그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 ''허슬러''와 ''바디 앤 소울''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했다. 그는 1931년에 성을 "로슨"에서 "로슨"으로 변경했다.그는 1930년대 초중반 뉴욕에서 번성했던 사회적, 급진적 극장이었던 레퍼토리 극장과 오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서 무대 감독과 연출가로 연극 경력을 시작했다. 1932년 로슨은 노동 운동에 관한 존 웩슬리의 ''Steel''과 린칭에 관한 리처드 메이바움의 ''The Tree''를 연출했다. 1년 후 로슨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독재와 함께 독일에서 막 승리한 나치즘을 비판하는 메이바움의 ''Birthright''를 연출했다.
1935년 로슨은 그의 첫 연극인 순진한 버레스크 댄서에 대한 코미디인 ''The Body Beautiful''을 쓰고 연출했다. 그 연극은 4번의 공연 후에 막을 내렸지만, 워너 브라더스의 감독 머빈 르로이는 감명을 받아 로슨과 개인적인 각본 계약을 맺었다.
2. 2. 연극 경력
로버트 로센은 연극 분야에서 직접적인 활동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영화 각본 및 감독 경력은 연극적 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39년 로센이 각본에 참여한 시끄러운 20년대는 갱스터 멜로드라마 장르였으며,[1] 1939년에 로센이 집필한 ''아이는 태어난다''는 1932년 연극과 영화 ''Life Begins''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2] 이 작품은 여섯 명의 예비 엄마들의 경험을 다루었으며, 원작을 수정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2]2. 3. 할리우드 경력
1947년 10월, 두 번째 레드 스케어 동안 미국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 소환된 19명의 "비우호적인 증인" 중 한 명이었지만, 증언을 요청받지 않은 8명 중 한 명이었다.[1] 1951년, 로센은 여러 HUAC 증인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었고, 같은 해 6월에 처음으로 HUAC에 출두했다.[1] 그는 자기 비난에 대한 수정 헌법 제5조에 따른 권리를 행사하여 소위 "강화된 제5조"를 취했다.[1] 그는 공산당원이 아니고 당의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증언했지만, 당원이었던 적이 있는지 묻자 답변을 거부했다.[1]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의해 비공식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콜롬비아는 그와의 제작 계약을 파기했다.[1]HUAC 조사 중 널리 행해지던 관행으로, 미국 국무부는 로센의 여권 갱신을 거부했다.[1]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친구이자 전 공산주의자인 엘리아 카잔과 마찬가지로, 1953년 5월에 위원회에 다시 나와 57명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1] 그는 위원회에 증언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 "저는 2년간의 생각을 거친 후, 어떤 개인도 개인적인 도덕성을 즐기거나 오늘날 제가 강력하게 느끼는 이 국가의 안보와 안전에 반하여 그것을 내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1]
엘리아 카잔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로센의 HUAC 인정은 많은 평생의 우정을 파괴했으며, 로센의 동료들의 경력에도 영향을 미쳤다.[1] 카잔의 경력은 번창했고 로센의 경력 또한 블랙리스트 이전만큼 빠르게 생산성을 회복했다.[1] 그는 1961년 ''허슬러''를 제작, 감독, 공동 집필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감독상, 각색 각본상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공동 작가인 시드니 캐럴과 후보 지명을 공유했다.[1]
1949년 작품 올 더 킹스 맨은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 성공하여 제21회 아카데미상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1] 시상식 직전에 그가 공산당원이었던 과거가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 소환으로 밝혀지면서, 로센은 아카데미 감독상이나 아카데미 각본상을 놓쳤다.[1] 이 작품은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간신히 승리했지만, 이후 로센은 자유로운 영화 제작이 불가능해졌다.[1]
1951년 비미국 활동 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하여 한때 영화계를 추방당했다.[1] 고뇌 끝에 전향하여 1953년 위원회에서 다수의 당원 이름을 증언한 이후 뉴욕과 유럽, 중남미를 영화 제작의 거점으로 삼아 두 번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지 않았다.[1]
2. 4. HUAC 청문회와 블랙리스트
1951년 HUAC에서 증언을 거부하여 한때 영화계를 추방당했다.[4] 고뇌 끝에 전향하여 1953년 위원회에서 다수의 당원 이름을 증언한 이후 뉴욕과 유럽, 중남미를 영화 제작의 거점으로 삼아 두 번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지 않았다.[4]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로슨은 1951년 HUAC 청문회 이후 약 2년 동안 일을 하지 못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1]2. 5. 블랙리스트 이후의 활동
1951년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에서 증언을 거부하여 한때 영화계를 추방당했다.[1] 고뇌 끝에 전향하여 1953년 위원회에서 다수의 미국 공산당 당원 이름을 증언한 이후 뉴욕, 유럽, 중남미를 영화 제작의 거점으로 삼아 두 번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지 않았다.[1]1961년, 폴 뉴먼, 재키 글리슨, 조지 C. 스콧과 같은 강렬한 배우들을 기용한 남성 드라마인 『허슬러』를 통해 다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후보로 지명되며 한때의 기세를 다시 보여주었다.[1]
3. 사망
로버트 로센은 여러 질병을 앓은 후 1966년 2월 18일 57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으며, 뉴욕주 해스팅스온허드슨에 있는 웨스트체스터 힐스 묘지에 안장되었다.[1] 그의 손자인 다니엘 로센은 얼터너티브 밴드 그리즐리 베어와 디파트먼트 오브 이글스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이다.
4. 작품 세계
로버트 로센은 필름 느와르를 개발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들은 노동자의 조건, 갱스터와 악당의 묘사,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주제로 다루었다.[1] 그는 성공에 대한 욕망과 야망을 미국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고, 자신의 영화에서 이를 탐구했다.[2]
로센의 극본은 대부분 각색된 것이었으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마크드 우먼'', ''래킷 버스터'', ''알렉산더 대왕''뿐이었다.[3] 할 윌리스는 로센이 쓴 ''로어링 트웬티스'', ''마크드 우먼'', ''바다의 늑대'' 등의 각본을 높이 평가했다.[4]
''올 더 킹즈 맨''은 미국 사회의 보수적인 변화 속에서 나온 후기 사회적 "메시지" 영화 중 하나로, 알코올 중독, 간통, 정치 부패,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다루며 이 장르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았다.[5] 2001년 미국 국립 영화 보존소는 이 영화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하여 보존했다.[6]
1961년 로센은 ''허슬러''를 제작, 감독, 공동 각본했다. 이 영화는 출연진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이야기의 "비열한 측면"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며, 2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다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1997년 국립 영화 보존소는 ''허슬러''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보존했다.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정신적인 무게를 지닌" 작품으로 묘사하고, 로센이 네 명의 주요 캐릭터를 모두 발전시킨 점과 흑백 촬영을 통해 "당구장의 암울한 어둠"을 표현한 점을 칭찬했다.
''릴리스''는 정신 분석 개념을 적용한 미국 영화의 예로 간주되며, 데이비드 톰슨은 The New 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에서 이 영화를 "로센의 영화 중 유일하게 열정적이고, 신비로우며, 진정으로 개인적인 이색작"이라고 평가했다.
5. 유산
로버트 로센은 필름 느와르를 개발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그의 작품은 노동자의 조건, 갱스터와 악당의 묘사,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주제로 다루었다.[1]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와 같은 영화 제작자와는 달리, 로센은 자신의 영화가 성공에 대한 욕망과 야망을 다룬다고 설명했다.[2]
''올 더 킹즈 맨''은 미국 사회의 보수적인 변화 속에서 나온 후기의 사회적 "메시지" 영화 중 하나로, 알코올 중독, 간통, 정치 부패,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다루며 이 장르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다.[3] 2001년 미국 국립 영화 보존소는 이 영화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하여 보존했다.[4]
로센의 1961년 작품 ''허슬러''는 제작, 감독, 공동 각본을 맡았으며, 아카데미상 2개 부문 수상 및 다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5] 골든 글로브 4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등 많은 상과 후보 지명을 받았다.[6] 1997년 국립 영화 보존소는 ''허슬러''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보존했다.
아카데미 필름 아카이브는 로버트 로센의 영화 여러 편을 보존했는데, 여기에는 《허슬러》, 《모두가 왕의 남자》, 《릴리스》가 포함된다.
6. 참여 작품
로버트 로센은 영화와 연극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에 참여했다.
- 영화
- 낙인 찍힌 여자 (Marked Woman영어): 로이드 베이컨, 마이클 커티스 감독, 1937년 - 각본 (각본가 데뷔작)
- 운명의 방랑자 (Dust Be My Destiny영어): 루이스 세일러 감독, 1939년 - 각본
- 격동의 20년대 (The Roaring Twenties영어): 라울 월시 감독, 1939년 - 각본
- 바다의 늑대 (The Sea Wolf영어): 마이클 커티스 감독, 1941년 - 각본
- 어둠의 가장자리 (Edge of Darkness영어):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1943년 - 각본
- 태양 속을 걷다 (A Walk in the Sun영어):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1945년 - 각본
-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영어):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1946년 - 각본
- 조니 오클락 (Johnny O'Clock영어): 1947년 - 감독, 각본 (감독 데뷔작)
- 보디 앤 소울 (Body and Soul영어): 1947년 - 감독
- 사막의 분노 (Desert Fury영어): 루이스 앨런 감독, 1947년 - 각본
- 모두가 왕의 사람들 (All The King's Men영어): 1949년 - 감독, 프로듀서, 각본
- The Brave Bulls영어: 1951년 - 감독, 프로듀서
- 맘보 (Mambo영어): 1954년 - 감독, 각본 /
-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영어): 1956년 - 감독, 프로듀서, 각본 /
- 태양이 빛나는 섬 (Island in the Sun영어): 1957년 - 감독
- 코르두라로 가는 길 (They Came to Cordura영어): 1959년 - 감독, 각본
- 허슬러 (The Hustler영어): 1961년 - 감독, 프로듀서, 각본
- 쿨 월드 (The Cool World영어): 셜리 클라크 감독, 1963년 - 희곡 원작
- 릴리스 (Lilith영어): 1964년 - 감독, 프로듀서, 각본 (유작)
- 연극
- ''아름다운 몸'' (The Body Beautiful영어): 1935년 - 감독
- ''쿨 월드'' (The Cool World영어): 1960년 - 공동 각본
- ''강철'': 1932년 - 연출
- ''나무'': 1932년 - 연출
- ''출생권'': 1933년 - 연출
6. 1. 영화
연도 | 제목 | 감독 | 각본 | 제작 |
---|---|---|---|---|
1937 | 마크드 우먼 | |||
그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 ||||
1938 | 라켓 버스터스 | |||
1939 | 먼지가 나의 운명 | |||
로어링 20년대 | ||||
1940 | 아이가 태어났을 때 | |||
1941 | 바다의 이리 | |||
안개 속에서 | ||||
블루스 인 더 나잇 | ||||
1943 | 어둠의 가장자리 | |||
1945 | 태양 속으로의 산책 | |||
1946 |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 |||
1947 | 조니 오클락 | |||
데저트 퓨리 | ||||
바디 앤 소울 | ||||
1949 | 언더커버 맨 | |||
올 더 킹스 맨 | ||||
1951 | 더 브레이브 불스 | |||
1954 | 맘보 | |||
1956 | 알렉산더 대왕 | |||
1957 | 아일랜드 인 더 선 | |||
1959 | 그들이 코듀라에 왔다 | |||
1961 | 허슬러 | |||
1964 | 릴리스 | |||
로센은 1961년 ''허슬러''를 제작, 감독, 공동 집필했으며,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감독상, 각색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공동 작가인 시드니 캐럴과 후보를 공유했다.
로센은 "필름 느와르"(프랑스어로 "회색 영화"라는 뜻)를 개발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만든 그의 영화에서 일관된 주제는 노동자의 조건, 갱스터와 악당의 묘사,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반대였다.[1] 로센이 각본을 쓰고 1939년에 개봉한 영화 ''내 운명이여'' 이후, ''The New York Times''의 평론가였던 프랭크 뉴전트는 워너 브라더스의 가난한 동네 소년들에 관한 멜로드라마 시리즈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2]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와 같은 영화 제작자와는 달리, 로센은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목표를 기꺼이 설명하려 했다. "제 영화의 많은 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성공에 대한 욕망, 야망이며, 이는 미국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요소이며, 서구 문명으로 알려진 곳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3] 에이브러햄 폴론스키는 "로센의 재능은 끊임없이 적용되는 힘이다."라고 언급했다.[4][5] 네브는 로센의 작품 대부분에서 사회적 관심사가 중심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릴리스''는 내러티브보다는 분위기를 강조하고 그림과 침묵을 통해 부적응과 광기의 본질을 탐구했기 때문에 로센의 이전 영화와 다르다고 언급했다.[6]
파버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강한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며, 1950년대 이후 그들이 남성 간의 관계로 대체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전 패턴에 대해 파버는 로센의 1946년 각본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을 언급했는데, 이 영화는 지나치게 멜로드라마적이지만 권력, 돈, 성공에 사로잡힌 여성을 묘사했다. ''릴리스''는 1960년대의 몇 안 되는 강한 여성 중 하나를 창조했다. 로센은 일반적으로 주인공을 파괴했다.
로센의 모든 극본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마크드 우먼'', ''래킷 버스터'', ''알렉산더 대왕''을 제외하고는 각색된 것이었다. 1951년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기 전, 로센이 각색한 작품 중 심각한 소설은 단 두 편뿐이었고, 로센이 쓴 ''올 더 킹즈 맨''의 초기 각본은 컬럼비아 내에서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워너의 제작 책임자였던 할 윌리스는 ''로어링 트웬티스'', ''마크드 우먼'', ''바다의 늑대''를 포함한 그의 최고의 영화 중 일부가 로센에 의해 쓰여졌다고 생각했다. 윌리스는 1946년 로센이 쓴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의 각본에 매우 만족했으며, 이 영화는 윌리스 자신의 회사에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로센은 윌리스의 다음 두 영화를 거절했다. 제작자로서의 윌리스와 작가 겸 감독으로서의 로센은 스튜디오의 통제 하에 있기보다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를 원했다.
''올 더 킹즈 맨''은 미국이 보수적으로 바뀌면서 나온 후기의 사회적 "메시지" 영화 중 하나였다. 토마스 샤츠는 ''올 더 킹즈 맨''을 알코올 중독, 간통, 정치 부패,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다루면서 이 장르의 최고작으로 여겼다. 2001년 미국 국립 영화 보존소는 이 영화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보존했다.
''허슬러''는 1961년 로센이 제작, 감독, 공동 각본을 맡았다. 당시 ''버라이어티''는 출연진을 칭찬하고, 이야기의 "비열한 측면"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으며, 영화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The New Republic''은 출연진과 로센의 "확실하고 경제적인" 연출을 칭찬했지만, 각본이 "위협과 범죄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2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다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의 4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많은 다른 상과 후보 지명을 받았다.
1997년 국립 영화 보존소는 ''허슬러''를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보존했다. 2002년,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장면이 기억 속에서 성장할 정도로 정신적인 무게를 지닌" 작품이라고 묘사하고, 로센이 네 명의 주요 캐릭터를 모두 발전시킨 결정을 칭찬했으며, 제임스 베라디넬리는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를 자신의 역대 영화 100선에 포함시켰다. 에버트는 또한 흑백으로 만들어진 "당구장의 암울한 어둠" 속에서 영화를 촬영하기로 한 로센의 결정에 찬사를 보냈다. 다른 찬사는 2000년대에 나타났다.
니나 라이브만은 ''릴리스''를 미국 영화 산업의 정신 분석 개념 적용, 또는 오히려 오용의 가장 극단적인 예로 간주했는데, 환자는 이미 정신병적이며 이전 정복의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The New 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에서 데이비드 톰슨은 ''릴리스''를 "로센의 영화 중 유일하게 열정적이고, 신비로우며, 진정으로 개인적인 이색작이다. 다른 영화들은 점점 더 시대에 뒤떨어지고 자기만족적으로 보일 것이지만, ''릴리스''는 성장할 수 있다."라고 묘사했다.
6. 2. 연극
로버트 로센은 1935년에 연극 ''아름다운 몸''(The Body Beautiful)을 감독했다. 1960년에는 ''쿨 월드''(The Cool World)의 공동 각본을 썼다.개봉 | 제목 | 비고 |
---|---|---|
1935 | 아름다운 몸(The Body Beautiful) | 감독 |
1960 | 쿨 월드(The Cool World) | 공동 각본 |
6. 3. 기타 연극 작품
초연 | 제목 | 비고 |
---|---|---|
1932 | 강철 | 연출 |
1932 | 나무 | |
1933 | 출생권 | |
참조
[1]
서적
Mother Goose Drank Scotch - Robert Rossen, An American Journey
[2]
서적
[3]
웹사이트
Moma.org
http://www.moma.org/[...]
[4]
웹사이트
WGA Awards
http://www.wga.org/a[...]
Writers Guild of America
2008-03-31
[5]
웹사이트
Preserved Projects
http://www.oscars.or[...]
[6]
웹사이트
Robert Rossen
201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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